기원전 350년, 지구는 전체적으로 지각활동이 활성화되는 시기에 들어갔다. 그보다 150년 전, 한랭기를 맞아 더 풍부한 목재를 구해 캄보디아에 와서, 인근 도서 해안지대까지 확산하면서 제철기지를 구축했던 인도 유래 제철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인도에서는 겪어보지 못했던 화산과 지진으로 활동으로, 공들여 세웠던 제철기지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서둘러 지각활동으로부터 안전한 새로운 제철기지를 만들 만한 곳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운을 시험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됐다.이들은 이미 자기들
기원전 350년, 한반도에 남방으로부터 철기문화가 도착했다. 그때부터 어느 정도 동질적인 하나의 사회집단을 가리키는 말로서 ‘가야’라는 말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사실 이 가설엔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 있다. 무엇보다 기원전 350년에 지각활동이 활발해져 동남아 지진 취약지대의 제철인들이 대거 이동하기 시작했다는데, 어떻게 해서 거의 같은 시점에 그 멀리 떨어진 한반도 남단에 도착해 동쪽에서부터 서쪽까지 일시에 확산되어 갈 수 있었겠느냐 하는 점이다. 아무리 고대 온난기에 해상활동이 대체로 활발했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빠른 속도의 이
역사 왜곡은 여러 가지 이유로 발생한다. 반드시 악의에서 나오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구전설화로 전해지는 것이든 기록에 담긴 것이든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걸 옮기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다. 그럴 적에 그 시대 상황으로 봐서 이해가 안 되거나 듣기 불편한 부분이 들어 있다면 사람들이 더 좋아할 만한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내용을 고치는 경우가 생긴다. 물론 앞서 여러 차례 말했듯이, 새로이 강자가 된 집단이 용의주도하게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기록을 다시 써서 남길 수도 있다.이런 저런 역사 변형의 와중에도 굳이 손을 대지 않아도 괜찮
“기원전 5세기쯤, 캄보디아 남쪽 해안부 영토를 다스리는 왕에게는 사랑스러운 공주 나기 소마가 있었다. 그녀는 벼농사를 주관하는 여신이며, 또한 뱃사람들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어느 날 그녀는 바닷가로 나갔다가 인도에서 온 프레아 타옹 왕자를 만났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공주는 바다의 왕인 부왕 나가에게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했다. 왕은 흔쾌히 받아들이고 바닷물을 들이마셔서 상당한 땅을 만들어주었는데, 젊은 부부는 여기서 왕국을 건설했다. 이것이 현재 캄보디아의 기원이다.”캄보디아의 건국 설화이며, 동시에 인도가 동남아시아 쪽으
가야 역사의 시원에서부터 출발해보자. 무대를 좁혀 보면 낙동강 하구다. 이곳엔 한반도에 인간 정주가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사람들이 살아왔다. 높은 산기슭의 기름진 평야, 그 평야와 나지막한 바다가 만나는 곳에 형성되는 풍요로운 갯벌— 원시적인 수렵채취 생활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천혜의 보금자리였다. 거대한 패총이 그 말없는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이곳에 언제부터 ‘국가’라고 부를 만한 사회체가 나타났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가야’라는 이름을 가진 정치‧경제‧사회 공동체가 시작된 건 기원전 350년 무렵일 거라는 추정을
2000년대 초 어떤 공영광고, 특이한 문구가 눈에 띄었다. “한국은 유엔이 지정한 물 부족 국가입니다.” 물을 아껴 쓰자는 거니까 좋은 말이긴 한데, 좀 이상하다. 유엔이 각 국가별로 물 공급량도 지정해준다는 얘긴가?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던 사람으로서 그런 슬로건이 나온 배경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1990년대는 지구환경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수준이 한층 도약했던 때다. 지구환경문제의 주요 이슈 중 하나가 ‘사막화’였다. 기후변화로 인해 수자원이 고갈되고 녹지가 사라져 사막처럼 되는 지역이 확대되고 있는 현상이다. 세계적으로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러니까, 백두산의 분화의 영향에도 부정적인 면만 있는 건 아닐 테다. 사실 필자는 지질학적 시간 스케일로 봤을 때 부정적인 영향은 일시적일 뿐이라 생각한다. 장기적으로는 긍정적 영향이 더 근본적‧포괄적으로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생명과정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본다. 한반도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DNA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을, 백두산의 영험한 기운에 대한 느낌은 거기서 오는 것 아닐까.하지만 백두산 분화의 긍정적 요인을 일목요연하게 과학적으로 증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21세기 들어 지금까지 짧은 기간 안에
946년 백두산의 천년 분화는 역사 시대 최대의 분화였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 백두산에는 천년 분화 한 건만 있었던 게 아니다. 그보다 400~500년 앞서부터 다수의 폭발성 분화가 간헐적으로 이어져 왔다. 좀 더 소소하게 화산재와 부석 등을 뿜어내는 일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즉 서기 500년대 초부터 900년대 중반까지의 백두산 대폭발기를 거치는 동안 한반도는 전체적으로 그로 인한 부정적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을 것이다. 분화가 멎은 이후에도 전국토에 화산재가 쌓였을 테니 작물이 잘 자라지 않고, 그 결과 영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건국해 서기 698년부터 926년까지 존재했던 나라다. 가야와 마찬가지로 자체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역사가 전반적으로 불분명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미스터리로 간주되는 부분은 바로 발해의 멸망과정이다. 한창 때는 위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한강 이북에서부터 만주와 연해주 전체를 차지했던 큰 나라였다. 멸망하기 30년쯤 전에는 거란족의 요주를 공략해 상당한 지역을 뺏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926년 거란족이 수도를 공격한지 단 3일 만에 와해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1980년대, 이에 대한 좀
백두산이 엄청난 거대 폭발로, 한반도에 사는 우리의 삶에 큰 피해를 주는 일이 짧은 시간 내에 일어나게 될까? 21세기 들어 십여 년 동안 비약적으로 발전한 관련 과학 및 연구 성과를 토대로 이제는 어느 정도 타당한 추정이 가능하다.앞선 연재 기사에서 보았듯이, 화산 분화가 일어나는 원리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힘의 균형관계에 있다. 외부 우주로부터 오는 전자파가 지구 내부의 금속성 물질을 끌어당겨 분화를 일으키는 힘과, 분화가 쉽사리 일어나지 않게 막는 화산 자체의 억제력 말이다. 백두산의 경우도 이런 균형관계에 대해 이해함으로써
‘밀레니엄 대폭발’. 서기 946년, 그러니까 기원후 첫 밀레니엄(1000년)의 끝자락에 있었던 백두산의 폭발성 분화를 가리키는 별칭이다. 우리나라 화산학에서는 ‘백운봉기 폭발’이라고 부른다.이 화산 분화는 역사기록이 남아 있는 시기, 즉 지난 5000년 동안 가장 규모가 컸던 것 중 하나다. 1815년 폭발해 향후 10년 이상 전 지구상으로 화산재를 퍼뜨리며 세계를 흉년으로 몰아넣었던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과 거의 같은 규모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한 건의 분화에서 쏟아져 나온 화산재 총량은 미국의 뉴욕 시 전체를 150미터 두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영산(靈山)’이라고 불려 왔다. 해발 2750미터로 한반도에서 제일 높은 산이자 한반도의 지붕과도 같은 위치에 놓여 있다는, 물리적으로 압도하는 팩트가 있다. 그 외에도 백두산은 뭔가 영적으로 높은 기운의 상징처럼 우리 조상들에게 다가왔던 것 같다. 이전 문헌들에서 백두산은 인자하고 영험한 산신령처럼 긍정적인 이미지로 나온다.하지만 현대인들은 매사에 부정적인 측면을 파헤치는 능력이 뛰어난 편이다. 백두산에 대해서도, 요즘은 국내에서건 해외에서건 온통 부정적인 담론들이 무성하다. 백두산 대폭발 가능성에 대한 담
한반도 남서해안, 전남 해남군 북평면 ‘이진마을’에 가면 눈에 띄는 점이 있다. 마을에 돌담이 많다는 점이다. 마을 외곽 이진성엔 돌담 비슷한 모양으로 석성의 흔적도 남아 있다.오래 된 돌담이나 석성의 흔적은 한반도 여기저기서 많이 볼 수 있다. 대개는 그 지역에서 난 돌을 쓰기 때문에 석질이 동일하고, 주변 자연 풍광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전혀 이질감을 주지 않는다.그런데 이진마을의 돌담이나 이진성터에는 처음 본 사람의 시선을 붙드는 특이한 점이 있다. 아래 왼쪽 사진처럼, 담이나 성을 구성하는 돌들의 외관, 즉 재질이 다양하다는
‘노발리스(Novalis)’라는 필명으로 알려진 18세기 독일 작가 프리드리히 프라이헤르 폰 하르덴베르크는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독특한 문체로 유명하다. 독일 낭만주의 기조에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서,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꿈같은 일들이 마치 마술이라도 작용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려진다.이런 자신의 스타일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현재 독일의 상황은 너무 참담해서 현실 그대로 글에 담을 수 없다. 그래서 동화 같은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산업혁명의 후발주자로서 극심한 환경오염문제 및 다양한 사회문
우리 역사서로서 제목을 제대로 달고 가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기록은 단 하나뿐이다. 이 조차도 가야 전체의 역사가 아니라 전기 가야연맹의 대표국가인 가락국, 즉 금관가야에 대한 내용만 담고 있다. 1281년 고려시대 승려 일연이 펴낸 ‘삼국유사’ 안에 포함된 ‘가락국기’라는 기록이다.가락국기는 물론이고 삼국유사 전체가 어느 정도 역사기록보다는 민담집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담겨 있는 내용 중에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어려운, 황당무계해 보이는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상당부분이 아이들을 위한 동화 버전으로 만들어져
‘동이전’(東夷傳), 즉 동쪽 오랑캐에 대한 글이라는 기록이 있다. 서기 3세기, 그러니까 가야가 몇 백 년 이상 제철제국으로 이름을 떨쳐오고 있던 때, 중국 촉나라 출신으로 서진(西晉)의 관료였던 진수가 쓴 ‘삼국지’라는 역사서의 일부다. 고대 한반도에 살던 집단에 대한 많지 않은 기록 중 제일 많이 인용되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진수의 입장에서 본 동쪽의 오랑캐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읍루, 예, 한(韓: 마한, 진한, 변진), 그리고 왜(倭)까지 포함된다.‘가야’, 혹은 ‘가락국’ 같은 이름은 여기 포함되어 있지 않다.
“식인종 흑인들의 마을을 간신히 빠져나와, 일주일 동안을 코코넛으로 연명하며 험한 숲을 뚫고 나온 신드바드는 섬의 반대편 해안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는 자신과 비슷한 모습이며 같은 아랍어를 쓰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웃 섬나라에서 온 사람들로, 이 섬에 후추농장을 만들어 놓고, 가끔 왔다 갔다 하며 관리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날은 후추를 수확하러 온 것이다.그들은 그의 이야기를 듣더니 그 악명 높은 흑인들의 수중으로부터 살아나온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그리고 후추의 수확을 끝낸 후 신드바드를 데리고 자기들의
가야는 위대한 해양국가‧제철제국으로서 조건을 여러 모로 갖추었다. 또한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나라로 번영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유물‧기록‧구비전승, 기타 흔적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가야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활동했었는지, 다른 국가들과 어떤 양상의 관계맺음을 가졌는지 보여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정말 희소하게 있긴 해도, 지금까지 ‘신화’로 간주되며 무시되어 왔다.지중해 지역의 상고대 및 고대 해양국가들의 경우는 다르다. 이들 국가가 어떻게 존재하고 활동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가 상당히 풍부하다. 누가 봐도 신화
“한반도 동남단의 가야는 동아시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아시아 전체, 혹은 세계 전체로 봐서도 손꼽히는 부강국이었다.” 지금까지 이와 관련한 사실을 다양한 논증 과정을 거쳐 밝혀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가야의 역사는 그 무수한 유물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요인을 적어도 세 가지 안고 있다.(후대에 집요하게 자행됐던 역사 왜곡은 논외로 하고 말이다.) 이 요인들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혹으로 요약될
‘가야’라는 국호를 가졌던 나라의 출범 시기를 가늠하려는 과정에서 뜻밖에 유라시아 대륙에 있어서 바닷길을 통한 철기문명 전파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딴 길로 빠지는 듯한 느낌도 들겠지만, 사실 이건 한반도 가야의 역사적 성격과 위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과정이다. 신화 속 미미한 나라인 줄 알았던 가야에서 엄청난 양의 고퀄리티 철제 부장품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사람들을 혼란 속으로 빠트렸다. 도대체 가야는 어떤 나라였을까?현대와 마찬가지로 고대에 있어서도 한 사회의 물질적 수준은 그 사회 전체의 위상을 보여주는